고중현교수 정년퇴임 소회
일찍이 무역입국의 기치아래 무역의 전사가 되고자 하였던 한 젊은이는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대한민국 재계에 큰 혜성으로 나타나, 태양만큼의 찬란함을 발하던 당시 13개 종합무역상사중에 하나이었던 (주)율산실업에 몸을 담았다. 10년내에 이사가 되겠다는 면접때의 당찬 포부를 몸소 실천에 옮기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면접때부터 수출부서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원이 받아들여져서, 서울 법대를 나온 그리고 수원 최씨에 옥니, 거기에 꼽슬머리- 이는 한 성깔한다는 대표적인 학력과 인성의 조합인데 이 요건들의 완벽한 결합체이었던 최현X 부장으로부터 2년간 혹독하게 무역전사로 다듬어지고 있을 무렵,
율산호는 좌초하고 말았다. 여러가지 설, 즉 정치적으로는 당시 정권하에서 광고일고 일색의 전라도 기업은 더이상 성장할수 없다는 정치환경론적 좌초설, 추석전후를 한 경흥물산의 ticket사건, 또 운나쁘게 청와대를 사칭한 사기꾼들에 의한 신회장 납치 미수사건 등 경제외적 악재의 빈발 등등.
그러나 율산호에 승선하여 미래를 같이 하려던 사회초년병의 눈에도 무리할 만큼 급속한 사업확장을 밑받춰줄 수 있는 재무능력의 한계, 그리고 중동에 치우친 수출시장구조의 편향성, 유동성부문에서는 D/A자금 결제를 위한 차환적 D/A거래등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보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채 파산하고 말았다.
공중해체되다시피 한 율산호에서 나는 어떤 배로 갈아탔을까요?
나는 그 때 젊은 동안의 눈으로 향후 우리나라 재계의 흐름을 간파하였다. 즉 '이 땅에 더이상의 율산과 같은 성공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권과 어느 정도 비호관계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한, (이는 금융면에서나 상역행정면에서의 전폭적인 지원을 뜻한다고 만 하자) 더 이상 당대에 형성되는 재벌은 용납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래서 보다 더 높은 차원 -거시적 차원이라 해두자 -에서 우리나라 무역의 방향타를 잡아보고 싶었다. 때마침 한국무역협회에서 사람을 선발한다하였다. 그리하여 바꿔 탄 배는 '사단법인 한국무역협회 조사부' - 학구적인 관점에서나,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설레이고 좋은 직장이었다.
무역협회조사부 국내조사과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그중 기억나는 업무는 한국은행에서 무역협체중 표본조사에 의해 발표하던 기업경영분석을 무역업체 전수를 대상으로 조사,분석한 '한국무역업체 경영분석'을 최초로 수행하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한은의 조사결과는 수출기업의 수익률이 +인데, 내가 수행한 한국무역업체의 수익률은 -로 조사되었다. 이 내용이 중앙일보 1면에 대서특필되면서 당시 상공부에 불려가서 이 상반된 조사결과에 대해 설명해주느라고 진땀 뺀 기억이 난다.
그 사유는 당시 엄청난 수익을 올리던 포항제철을 통계적 의미에서 극단적 수치 배제하여 분석data에서 제외시킨 결과인데 이를 납득하지 못하였던 상공부 수출1과 직원들에게 하루 종일 설명한 적도 있는 등 그런대로 인정받으며 재미있는 생활이었던 것같다.
그렇게 4년이 흐르던 중 충남대학 무역학과의 '무역실무' 강좌를 맡게 되었다.
그 당시 강의를 주선해 주었던 충남대학교의 윤이호교수에게 감사드리고 그후 제대로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러운 마음에 여기 실명으로 기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역협회에 근무하면서 금요일마다 유성 충남대로 내려가 6시간을 강의하는 것은 생각보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서 도전해 볼 만한 가치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실무경험이 없는 교수들로부터 책에만 의존하여 어깨넘어로 흘낏 보듯한 무역실무의 세계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나만의 장점으로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충분하였고 나 역시 나를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을 맞났다는데 크게 매료되었다.
첫 대학강의를 성황리에 마친 것같았다. 이 자신감으로 관동대학 교수초빙에 응모하였고, 서울대 경영학 석사를 기초하여 종합상사에서의 무역실전경력 2년과 대한민국 무역의 산실로 여겨지던 한국무역협회 조사부에서의 4년의 경력은 대학교수로 발탇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단과 대학이었던 관동대학 면접과정에서 '종합상사 경험에 한국무역협회 근무면 더할나위없는 자질의 소유자' 라고 치켜세워주셨던 행생처장이셨던 고 김남득(행정학과) 선배님께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로부터 34년6개월이란 정말로 긴 세월을 관동대학교 경영대학 무역학과에서 숱한 제자들을 만날수 있는 기쁨을 누리면서 또 그들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고히 고히 간직하면서 교수로서의 생활을 이제 막 접는다.
34년 하고도 6개월이란 세월은 묘사하기에도 너무 긴 세월이다.
1983년 딸아이 손잡고 강릉으로 이주하여 전화도 없이 살았던 시절, 그리고 2년후 갓 태어난 둘째아이, 막 100일 지난 어린아이와 3살배기 딸을 데리고 고속버스 타기에는 너무 짐이 많아 급하게 중고차시장에서 마련했던 흰색 포니2와 시작하였던 my car시절.
* 또 학생들과 함께 하였던 수학여행의 추억들 -울릉도, 제주도, 남해안일주, 심지어 서울 여의도의 이산가족찾기 현장까지.
* 학교에서 자체평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9시 출근하여 밤9시 퇴근은 기본, 그 다음날 새벽에 별보고 퇴근하던 추억들... 전교수를 대강당에 모아 놓고 평가 전략, 아니 협박성 전략을 설명하고 추진하던 겁없던시절....
* 그리고 그후 대학교육협의회의 평가위원이 되어 2년간에 걸쳐 타 대학교에 실사를 다니며 칙사아닌 칙사대접을 받았던 시절-- 살 많이 키웠습니다..
* 젊은 나이에 경영대학원장이 되어 원생 유치를 위해 속초부터 삼척까지 훝던 유치작전,
그리고 최고경영자과정 원생들과 같이 하였던 백두산의 정기, Canadian Rocky의 웅장함, Hong Kong과 Macao의 야경, Beijing에서 맞이한 대륙의 추위 등등.
* 경영대학장을 맡으며 학생들의 행사때마다 야구선수 이상훈을 벤치마킹하여 달리는 모습으로 연단으로 뛰어 올라 축사를 하며 젊음과 더불어 젊음을 과시하려던 내 발상..
*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였던 Trade Incubator.
전국에서 20개 대학만을 선정하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승리한 정부지원 사업!.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부지원금과 1대1 대응투자라는 기본 틀을 교내 다른사업과의 "형평'을 거론하며 1푼도 투자하지 않았던 불성실한 학교의 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간 대응투자 한 것으로 보고하면서, 그 자금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지금도 그 생각은 더 이상 하기도 싫다.
좌우지간 내가 진두진휘하던 Trade Incubator는 2004년 10월 중국에 $1,625의 화장품수출에 성공하였고, 이 수출성공의 일화는 지역 영동방송(YBS)을 포함하여 KBS라디오등에 특별방송 내지 좌담으로 전파를 탔고 지방신문을 비롯하여 10여개 매체에 관동대학의 이름을 날리는 전기가 되었다.
Trade Incubator사업단의 백미는 2007년 2월 벨기에 브러셀에서 개최된 2007 EUROPACADO박람회에 정식으로 booth를 임대하여 참가하였던 것일게다. 대학생 신분에 유럽까지가서 유럽 5대박람회중ㅇl 하나의 유명박람회에 정식으로 참가하여 상품판매의 기회를 체득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여도 신명나는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 또 2002년부터 개설한 '무역창업론'과목의 현장학습으로 해외에 직접 우리 상품을 hand-carry하여 현장판매하던 '한국상품판매전'. 2002년부터 2016년 10월에 이르기까지 16차레에 걸친 해외상품판매전의 성공적 개최. 일일이 거론하자면 중국 텐진과 베이징, 일본 도쿄,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 베트남 호치민에서의 혁화박람회 참관, 캄보디아 씨엠립, 인도 뉴델리, 터어키 이스탄불등지에 대한 시장조사 그리고 브러셀에서의 수출상담경험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전시회참관 등 지방대학 무역학과의 발자취치고는 스스로도 대견했다고 자화자찬할만한 수많은 기록과 학생들과의 유쾌하였던 여행들을 뒤로 하며~~~
이제 34년 6개월간의 학생들과의 만남을 마무리하려 한다.
흔히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워지는 몇몇 직장만큼이나 좋았던 한국무역협회를 떠나 강원도 골짜기로 삶의 터전을 바꾼 내 결정에, 내 스스로 자족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사랑한다!!
특히 2002년이후 작년에 이르기까지 16회에 걸쳐 해외에서 개최하였던 '한국물품판매전'의 추억을 정말로 소중하게 간직하며, 이에 참가해준 년인원 400여명의 제자들에게 함께한 추억만큼 그들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건승하기를 축원한다.
아쉬운 추억으로는 Trader Incubator사업 운영시, 학교로부터는 단돈 1원 한푼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결재와 보고만 재촉하는 등 죽여 버리고 싶도록 서운한 감정도 있었지만 사업신청때, 신청서에 허가 도장을 찍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죽 서운하면 이런 표현을 . 아마 조금만 지원해 주었어도 정말 멋진 Incubator로 성장시킬수 있었을텐데...
워낙 돈이 없다고 하는, 지원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 그런 대학이었으니까.
그래도 역경속에서 수출성공과 유럽의 벨기에, 파리, 프랑크프르트, 이스탄불, 그리고 앙코르왓트, 프놈펜, 호치민, 뉴델리, 싱가포르 등 세계 여러곳을 학생들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힐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추억들이었던가!!! 함께 하였던 내 제자들에게 깊은 감명과 좋은 추억으로 평생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모두 건승하자!!
그리고 소식 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