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행

삼전도비의 정식명칭 대청황제공덕비

고박사가 본 세상 2014. 2. 4. 20:48

치욕의 역사라고 묻는 다고 묻어지랴? 바로 이 삼전도비가 증명하듯이 챙피하여 일부러 묻고, 고의적으로 방치하여도 이 비석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알려주려고 홍수에 다시 환생하였다.

무엇을 알려주려는 것일까?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을 막으려 탐구하는 것이다. 이 치욕의 삼전도비를 거울삼아  조심하고 경계하고 끝내 극복하여야 한다. 우리 한반도에 우리를 우습게 보는 중국과 일본 놈들을의 만행을!!

지금의 중국은 어떠한가? 다시금 그들의 오망방자한 발톱을 드러낼려고 하지 않는가? 조심하자!

우리가 중국에 비해 월등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던 때는 고주몽이후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장군 강감찬 장군 그리고 최근 정확히는 국교정상화된 1992년이후 한 10여년간일 뿐! 그외에는 중국이란 애?들은 자신들의 힘이 뭉쳐지고 나면 우리를 괴롭혀온 족속들이다.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땅에 3번씩이나 부딪쳐 조아린 것도 모자라서 침략자의 공덕비까지 우리 손으로 만들어 세운 이 비극의 역사를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그 자들이 여진족 바로 청 태종인것이다.

그들의 방자함을  또 보여주는 것!  

비석을 보면 그 옆에 비석없는 귀부가 하나 더 있다 그 사연은?

 

이런 방자한 놈들!!!!

삼전도비의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조선 전기까지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해 후금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해왔다. 급기야 이들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 칭하고 조선에 신하의 예를 요구하면서 국교가 단절됐다. 인조와 반정세력은 친명책으로 일관하자 1636년 청나라 태종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을 침공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거하던 인조는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변 삼전도 나루터에 와서 강화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던 1637년 1월30일의 기록은 처참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억된다. 남한산성 행재소를 나온 인조는 곤룡포 대신 쪽빛 평민복을 입고 맨발로 삼전도의 청 태종 군막까지 걸어왔다. 이어 인조는 군막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림)로 항복을 표시했다. 역사의 기록은 머리가 땅에 조아릴 때 머리 찧는 소리가 높은 자리의 태종에게 종치는 소리처럼 들리도록 요구하였다하며 이로 인해 머리는 핏투성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청이 물러난 후 조선은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차가운 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우뚝한 돌비석이 큰 강의 머리에 섰도다.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로다"로 끝나는 글귀를 만주문자와 몽골문자(앞면), 한문(뒷면)으로 음각된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거북모양으로 조각된 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용문양의 이수로 장식된 형태다. 지금 비석의 글자는 대부분 훼손돼 있다. 그러나 비석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선명하다. 치욕과 더불어 치욕의 역사도 간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주족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여 비석의 만주어는 더 이상 쓰여지지 않는다. 강대했던 만주족도 나라가 몰락하면서 백성만 곤궁해졌다. 삼전도비 앞에서 두 민족의 영욕을 떠올리며 다시 불행한 역사의 전철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이 비운의 비석은 이제사 제자리를 찾았다지만 그 후예들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청일전쟁후 일본과  협잡하여 빼앗아간 우리의 간도 땅에 대해 우리는 왜 아무말도 하지 못? 안?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의 과거와 현재가 저 사진속의 고층빌딩과 비석처럼 어우러져 간다.